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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이야기와 함께 자라왔다.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끼며 심취하고 등장인물에 자신을 투영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대게 정적이기보단 자극적인 사건을 통해 진행된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는 미디어의 발달로 자극적인 사건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우리가 굳이 들으려 하지 않아도 우리 뇌 속으로 침투한다. 애석하게도 미디어의 알고리즘발달과 인간의 선택편향적 본능이 편향된 이야기를 공유하는 집단으로 나누기를 가속시킨다. 그런 경우 사건의 기저에 깔린 여러 면과 가능성은 무시되고 자극적인 사건의 겉만 이야기하게 된다.

*기록

작가는 여러 미디어를 통하거나 일상 속에서 경험한 사건들의 내러티브와, 신화와 역사 속 사건의 내러티브의 구조적 유사성을 극의 형식을 띤
이미지로 모방하여 만든다. 이 이미지들의 이야기는 작위적이며 허구적이다. 이는 실제 사건의 대상을 제거하거나 재구성함으로써 사건의
내러티브 기저에 깔린 본질을 강조하여 관객과 이야기하려 함이다.

*불과 폭력

역사가 보여주듯 우리 세계는 불로 일어나고 불로 사라졌다. 현인류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는 불의 종족이라 불러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
기저에는 폭력성이 깔렸다. 폭력은 사건의 기폭제이며 불과 유사하다. 중요한 것은 폭력의 당위성에 있다.
하지만 대게 결론이 나버린 상태에서 그 결과에 대한 검증은 불필요해질 때가 많다. 결과 그 자체가 타당성을 가지게 하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순수함을 강요받는다.

*유령선이 된 바보배

르네상스가 도래하던 시기인 1486년에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장문 시 ‘나렌시프(바보배)’가 등장하였다.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바보배는 실제로 존재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정신 이상자(즉 배제자)들은 감금해야 한다는 생각이 유럽을 지배했었다. ‘광인’들은 국가에서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리저리 기관에 위탁되어 떠돌게 되었으며 이는 마치 바보배와 같았다. 중세와 근대에는 정상으로부터 벗어난 이들을 정신이상자로 여겼다. 여기에는 인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 반항적인 사람, 창녀, 기타 정상의 범주를 벗어난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포함됐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난 자들, 트렌드에 반응하지 못하는 자들을 배제시킨다.
우리는 종종 집단 내에서 가장 약한 이들을 비정상화 (보편적 인간과는 다른 존재) 시켜 배제의 논리를 정당화 시키곤 한다. 외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통해 타인을 구분하는 과정에서 보편적이지 않은 행동과 코스튬, 신체를 한 그들에 대한 소문을 확대 재생산시키고, 더 나아가 이러한 이야깃거리는 도덕적 판단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우리가 믿고 생활하고 있는 세계에 속하지 않고 우리에게 피해를 줄 여지가 다분하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공공의 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을 더욱 배척하여 존재를 희미하게 함과 동시에 그들을 공포의 존재로 만들었다. 과거 고대 그리스나 로마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유지되고 성장하였다. 그 문화를 들여다보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노예제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그들은 천성이 게으르고 인내심이 부족하며 육체적 노동에 적합한 신체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비정상성을 세우고 거기서 스스로 정상성을 확인한다. 차차 시간이 흘러 근대에 들어 노예제가 폐지되고 비정상성의 빈 구멍에 빈민이 채워졌다. 근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통상적으로 계층의 이동은 비교적 자유로워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빈민 중 가장 빈민들에게 비정상성의 상징을 부여하여 그 외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정상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공포심을 심어준다. 조지 칼 린의 스탠드업 코미디 쇼에서 가장 낮은 하층민은 중산층을 겁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주류 역사에서도 그들의 존재를 지워나가려고 한다. 그들의 존재는 이제 희미해져 두 눈을 부릅뜨고 집중하여 보지 않는 이상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치 유령처럼 희미해져 버린 것이다. 그들을 배제 시킨 자들은 생각보다 그렇게 악한들이 아닐 것이며 근면 성실하며 약자를 보면 도우려고 하는 이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중 자극적이고 괴물 같은 면만을 취사선택하여 판단하려는 쉽고 재밌는 방식에 길들어 있다. 그저 우리는 효율성을 추구할 뿐이고 그 과정에서 괴물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희미한 유령을 보는 것처럼 우리는 두려움에 떨게 된다. 희미한 안개 속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미지에서 오는 두려움 말이다.
그렇게 바보배는 차츰 유령선이 되어간다. 그 유령선은 이름 없는 땅이 되어버렸고 이름을 가지고 있는 땅의 주민들은 유령선이 자신들의 땅에 정박하길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흙을 내어주려고 하지 않는다. 초연결 시대에 사는 우리는 배제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여기저기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실어 나르고 있다. 두려움은 계속해서 커져 나가고 그들의 약점은 우리에게 공포의 유령선이 되어 머리에 정박 되어버렸다. 우리가 두려워야 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잊혀진 신 그리고 괴물

주류화된 신화나 종교의 서사 이면에 가려진 상대적으로 비주류화 된 서사를 다루고 있다. '수라의 길, 2022'의 경우 작품명에서 보여지듯이 '아수라'와 관련된 서사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대중에게 성탄절/크리스마스로 익숙한 12월 25일의 경우, 국가나 종교에 따라 태양절이 되거나 다를 기념일이기도 하는데 같은 맥락으로 '아수라'는 흔히 불교에 등장하는 신으로 인식되지만 인도이란신화에서 등장하는 신이기도 하다. 페르시아의 신격 마즈다중 최고신인 아후라는 인도 베다에선 아수라로 읽힌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서사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고 잊혀져버린 고대 인도이란신화와 현재 섬겨지는 신에 관련된 서사를 담고 있으며, 앞서 언급한 상대적으로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오가는 요소들에 대한 메세지가 담겨있다. 작품에 작게 등장하는 미륵불은 작품과 서사가 이어지는 '계승중, 2022'의 복선으로 볼 수 있는데 관련된 서사의 '미트라'가 인도신화에선 마에트리아로 결국 불교의 '미륵'과 동일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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